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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01일 / 여성의 기쁨, 신부의 행복
고린도후서 11:1-2

   프랑스 여류작가 시몬 드 보부아르(1908~1986)는 그의 작품 ‘제2의 성(1949)’에서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고 말했습니다.  일리 있는 말이긴 하지만 여자로 태어나지 않으면 만들어지지도 않는다는 의미에서 여자는 먼저 태어나는 것입니다.  태초에 여자는 남자를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여자가 태어났을 때, 하와의 탄생의 날에 아담이 기뻐서 노래했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창 2:23).  한마디로 여자와 남자의 신비한 연합을 노래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어떤 여자와 남자의 결합에서도 이와 같은 절대 이상이 실현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말씀은 신령한 의미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몸 된 교회의 연합에 대한 계시입니다.  신구약 성경은 남자와 여자의 결합에 대해서 말할 때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에 대한 유비를 가지고 설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서 결혼의 이상적인 정체성을 발견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 image에 접근하는 만큼 결혼생활의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엡 5장은 아내와 남편에 대한 가장 긴 교훈이면서도 아내와 남편을 권면하는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 설교하는지 혼동됩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22)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24)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25)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28)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31-32)”  젊은 여성과 이야기해보면 그들의 한결같은 현실적 소망은 좋은 남성을 만나 현숙한 아내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과년한 자녀를 둔 부모들과의 대화도 예수님 이야기, 교회 이야기로 시작지만 마지막에는 아들 딸 시집‧장가 이야기로 끝납니다.  목회서신으로 알려진 딤전 5장에서 바울이 지도합니다.  “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는 나이가 60이 덜 되지 아니하고 한 남편의 아내였던 자로서…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비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9,14) 그러나 장가가도 시집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고전 7:28)”

   우리는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현실적인 것이 정직한 것입니다.  여성들의 끈질긴 소망과 양보할 수 없는 꿈은 남성에 거는 기대와 가정에서 안정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말에 처녀가 시집가기 싫다는 말은 거짓말이라고 했습니다.  입으로는 무슨 말을 하든지 그 속 중심에는 시집가서 남편의 사랑을 받고 자녀를 낳아 기르고 싶은 열망이 있습니다.  교회는 그들을 십분 이해하고 좋은 결혼, 좋은 가정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고전 7장 결혼장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 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전 7:8-11).  현실적인 욕구는 그렇다 치고 그녀들의 꿈이 결혼에서 실제로 이루어지고, 남편의 집에서 안정을 누리게 되느냐? 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그렇게 간단치 않습니다.  생명을 위하여, 행복을 위하여 결혼하지만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클 수밖에 없습니다.  죄가 없던 낙원에서마저 긴장이 감돌았던 결혼생활인데 하물며 죄도 있고, 죄인들로 구성된 구조악이 있는 세상에서의 결혼생활이 평탄할 리가 없습니다.  나의 욕구, 배우자의 욕구, 가족들의 욕구는 이해관계에서부터 부딪칩니다.  사람은 제어할 수 없는 욕망 덩어리인데 어떻게 그가 내게서, 내가 그에게서 계속 만족을 얻고 평안을 누리겠습니까?  

   사랑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 사랑이란 게 도무지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것이 문제를 키웁니다.  표면적으로는 남자의 사랑이 많이 흔들리는 것 같아 보여도 사실은 여자의 사랑이 더 많이 흔들립니다.  어떤 대상에 대한 사랑은 어떤 기간이 지나면 소멸하기 마련이라는 냉혹한 법칙을 우리 모두는 쉽사리 초월하지 못합니다.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는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고전 7:1-3).  어떻게 보면 결혼은 마치 필요악처럼, 음행에 대한 안전망의 구축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모두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분명히 그런 측면도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도 아담과 하와만 살 때가 위험천만이었습니다.  뱀이 왔고 시험이 왔습니다.  둘만 가지고는 결혼의 이상을 성취할 수 없었습니다.  두 사람의 사랑만 가지고는 족불급이요 수준 미달입니다.  두 사람은 각각 자기의 영혼의 남편에게서 무한한 사랑의 공급을 받아야 했습니다.  무궁한 능력의 배급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결혼의 어려움과 목마름과 부족함을 채우고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고전 7장의 복잡 다난한 어려운 문제를 한방에 해결할 수 있는 열쇠를 고후 11장 본문에서 찾아봅시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한다고 했습니다.  내 영혼이 정결한 처녀로 내 영혼의 감독이신 예수님 앞에 서고, 내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이 내 영혼의 남편으로 내 앞에 서실 때 모든 문제는 해결됩니다.  영적으로 해결되면 육적으로도 해결됩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4차원이 육적인 3차원의 삶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도움 없는 결혼생활은 어렵습니다.  성령의 위로 없는 인간관계는 힘듭니다.  그러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면 문제가 다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와로서 언제나 그분의 기쁨의 대상이 됩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  주 예수의 구원의 은혜 안에 우리 영혼이 평안을 누립니다.  존재가치를 발견합니다.  삶은 감동이요 감격이며 기쁨이 됩니다.  찬 486장,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주 예수의 구원의 은혜로다’를 다같이 부릅시다.  

   여자는 만들어지기 전에 태어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 태어납니다.  한 남자의 아내일 뿐 아니라 둘째 사람(고전 15:47)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됩니다.  한 여자의 남편일 뿐 아니라 마지막 아담(고전 15:45)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됩니다.  신부의 행복은 신랑에게 달렸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신랑은 어떤 분이십니까?  사람은 하나님께 받은 만큼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습니다.  사랑을 받은 만큼 사랑할 수 있고 용서받은 만큼 남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품과 태도 그리고 존재와 사역의 성질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첫째, 그분의 성품에는 들보가 없습니다.  한없이 겸손하시고 한없이 온유하십니다.  결혼생활에서 제일 걸림돌이 되는 것은 성격 차이입니다.  전에는 몰랐는데 살아보니 숨겨진 들보가 드러납니다.  이해할 수 없는 독특한 가시가 드러나서 가까이 있는 배우자가 찔립니다.  그때부터 남 모르는 고민이 시작됩니다.  자신에게는 엄청난 들보가 있으면서 곁에 있는 사람의 먼지와 티를 탓합니다.  기가 막힙니다.  누구한테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서서히 결혼생활에 금이 가고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투명하시고 어린아이 같이 단순하신 분이십니다.  독일의 시성 괴테는 ‘누구든지 자신에게 있는 독특한 것을 극복한 사람은 행복한 운명을 누린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우리가 보통 크렘린이라고 하면 알 수 없는 사람, 그러면서도 독특한 가시를 숨기고 있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크렘린은 남에게 무거운 인상을 주지만 신자는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자발적인 피에로가 됩니다.  피에로는 이웃을 위해 기꺼이 광대 노릇도 할 수 있는 유연하고 친절한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감추인 냉혹한 발톱이 없습니다.  냉소도 없고 비판도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고(막 6:6) 그들의 죄성에 대하여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셨습니다(막 14:33).  자기 신화도 없고 자기 숭배도 없습니다.  야심도 없고 비교감정도 없습니다.  성령 충만하고 진실합니다.  청순하고 양선합니다.  우리와 영원히 동거하실 신랑 되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워라 내가 다 가르쳐 주마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  이런 친절한 주님과 함께 사는 데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느긋하신 신랑과 함께 사는 신부는 얼마나 여유롭겠습니까?  마음이 쉼을 얻습니다.  억압도 없고 함정도 없습니다.  무슨 짐이든지 함께 짊어집니다.  무슨 일이든지 함께합니다.  그것이 내 짐은 쉽고 내 멍에는 가볍다는 뜻입니다.  신랑과 함께하는 일은 즐겁습니다.  행복합니다.  그것은 숙제가 아니라 안식입니다.  의무가 아니라 특권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30).  남편의 품에서 쉴 수 있는 아내는 행복합니다.  쉼이 되시는 신랑 때문에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분에게는 도무지 들보가 없습니다.  

   둘째, 그분의 태도는 한결같으십니다.  일정하십니다.  진리의 제일 되는 특징은 한결같고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태도가 한결같다는 것, 그것이 행복의 기반입니다.  한결같아야 믿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은 영속적인 진리입니다.  칼빈이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존재할 뿐 아니라 나를 향해 현재 임하여 계신다’  그렇습니다.  영속적인 것은 신적인 것이고, 신적인 것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왜 부모님을 좋아합니까?  그분들의 사랑이 한결같고 어떤 형편, 어떤 사정에서도 우리를 반겨주시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면서 아내와 남편 사이의 기대치는 점점 줄어듭니다.  그러나 마지막 남은 것이 하나 있다면 반겨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왜 좋습니까?  우리가 한 주간 탕자 같이 살다가 왔어도 주일날 교회만 나오면 한결같이 반겨주시기 때문입니다.  예배시간에 꼭 안아주시며 인애하신 말씀의 떡, 생명의 양식, 영혼의 샘물을 먹여주시기 때문입니다.  시 69:13의 말씀입니다.  “여호와여 나를 반기시는 때에 내가 주께 기도하오니 하나님이여 많은 인자와 구원의 진리로 내게 응답하소서” 할렐루야!

   예수 우리 신랑은 오늘도 우리를 반겨주십니다.  좋아하십니다.  “내 누이, 내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아 4:9)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내가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아 2:14)”  그분은 나를 영원토록 반겨주십니다.  George Burder(1838)가 말합니다.  ‘인자하심을 따라 약속된 축복을 베푸실 때 그것은 진리이시다’  히 13:8도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찬 405장,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또 찬 135장, ‘어제께나 오늘이나’를 다같이 부릅시다.  여성이 배우자를 고를 때 ‘내 이상과 내 vision에 맞다, 안 맞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그런 것이 무슨 조건이나 됩니까?  남성의 한결같은 사랑은 얼마든지 여성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여성은 자기를 한결같이 사랑해주는 남성을 열망합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신랑의 한결같은 사랑을 받고 사는 신부는 행복합니다.  언제나 한결같으신 예수님 때문에 행복해 하십시오.  그분에게는 변덕이 전혀 없으십니다.  

   셋째, 그분은 우리의 삶에 대해서 궁극적인 책임을 지십니다.  책임성이 하나님 형상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이 세상 남자의 삶이 고달픈 것은 책임감 때문입니다.  남자가 한번 결혼하면 그 가족에 대해서 무한책임을 져야 합니다.  여자들은 일반적으로 그런 책임감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해 줄 것이다, 남편이 다해 줄 것이다’ 그렇게 단순히 믿습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많이 재잘거리며 즐겁게 살 수 있는가 봅니다.  그러나 남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 먹고 살까? 어떻게 가족들을 부양할까?’ 죽을 때까지 그 마음에 긴장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평균 수명도 7-8년이나 차이가 나나 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에 위대한 복음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는 모두 예수에게서 났습니다.  예수 신랑을 위해 존재하다가 예수 신랑에게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지으셨고, 그분이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존재의 근원이시오 삶의 바탕이십니다.  우리 신랑의 위엄찬 음성을 들어보실까요?  그분의 음성이 요한계시록에서 은은히 울려 퍼집니다.  “나는 α와 Ω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계 1:8) 이루었도다 나는 α와 Ω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 21:6-7)” 할렐루야!  

   그래서 우리는 이 영원무궁한 인격이 앉아 계신 은혜의 보좌 앞에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담대히 나아갑니다(히 4:16)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나는 α와 Ω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계 22:12-13).  α와 Ω이신 그분이 우리를 책임진다는 위대한 메시지입니다.  우리 죄짐을 지신 분이 우리 인생의 짐도 지십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책임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나의 삶, 나의 죽음도 하나님의 책임입니다(롬 8:11).  나에겐 궁극적 책임이 없습니다.  우리는 거저 그분만 믿고 살면 됩니다.  그분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의 이끄심만 받으면 됩니다.  지난주일은 6.25 발발 68주년이었습니다.  50. 6. 25 주일날 북괴군이 중공군과 함께 남침했습니다.  한국전쟁에서 수십만이 죽고 수백만이 다쳤습니다.  그런데 신자의 α와 Ω되신 분이 당신의 뜻이 있어서 우리나라를 건져내시고 우리들을 살려주셨습니다.  앞으로도 이 나라를 지켜주시고 우리 자손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실 줄 믿읍시다.  그 무서운 전쟁에서 우리를 건져주신 주님이 이 평화의 세기에 우리를 버리시겠습니까?  우리들의 존재와 삶에 대하여 무한책임을 지시는 신랑 때문에 행복에 겨워 삽시다.  그분이 내 삶의 궁극적 책임자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 신랑 때문에 우리는 결혼생활의 목마름과 장애를 넉넉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배우자의 끝없는 욕망과 불성실과 무책임성이 주는 상처를 진정시킬 수 있습니다.  세상 걱정에 눌리지 않고 소망 가운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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