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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5일 / 성내기도 더디 하라
야고보서 1:19-27

   사람은 누구나 정신적 질환에 걸려있다고 하면 무리일까요?  유전적으로 환경적으로 취약점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성격적인 취약점은 여러 가지 증상으로 나타납니다.  불쾌지수가 높은 날에는 대부분 신경질과 분노에 시달립니다.  일상생활에서 성내는 것은 별것 아닌 것 같아도 그 미치는 영향이 대단합니다.  호의와 유쾌한 감정을 가졌다가도 찌푸린 인상 하나 때문에 모처럼 좋았던 기분이 바람 앞에 촛불처럼 사라집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반가운 사람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교회에서 은혜받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모처럼 말씀의 은혜를 받아 성령의 훈풍에 즐거워하다가도 그만 사소한 말다툼 하나로 그 은혜가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일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경험합니까?  온유하고 부드러운 마음의 상태가 성내는 일을 당하면 그만 텅빈 심정이 되고, 패배감만 남습니다.  이것을 보면 사람이 성내는 것이 작은 일 같으나 큰 것을 자랑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내는 사소한 일들이 공동체의 분위기와 사람의 심령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사람은 이성적 존재라고들 하지만 80%는 감성적 존재라고 해야 옳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다투는 것, 성내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다투는 시작은 둑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잠 17:14) 일평생을 어두운 데에서 먹으며 많은 근심과 질병과 분노가 그에게 있느니라(전 5:17)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시 90:9)”  실상 인생은 분노의 연속이라고도 할 만합니다.  그러면 분노는 어디서 생기며 분노 속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요나는 성 잘 내는 다혈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니느웨 성읍 사람들이 회개했을 때 심히 싫어하고 분노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욘 4:2-3).  대단하지 않습니까?  어찌 믿는 성도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성품이 자신에게는 구원이 되어 좋지만 남에게는 그래선 안 된다는 이런 심보가 어디 있습니까?  그렇지만 감정적으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성내는 것은 제 나름대로 이유가 있고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런 요나를 수용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나님은 우리의 감성을 지으신 분이시라 우리의 감성을 충분히 이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의 성냄과 푸념을 받으시고 제 정신을 차리도록 시간을 두고 뜸을 들이고 계십니다.

   요나가 성낸 첫째 이유는 편협한 민족주의, 종교적 소아병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의 민족이 니느웨 민족에게 받은 정치적 경제적 억압을 지금 종교적 신앙적으로 보복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이 회개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우리와 똑같이 받는다면 너무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인간적으로 감성적으로 니느웨 백성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방법이던 손을 좀 봐야겠는데 그것을 하나님이 막고 계신 데 대해서 불만입니다.  이를테면 우리 민족이 일본 민족에게 갖는 심리와 비슷합니다.  세상은 좁습니다.  받으면 주어야 하고 또한 주면 그대로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인물은 바뀌어도 주 안에서 주고받는 일은 틀림없이 지속됩니다.  우리는 이웃집이 잘 되는 것을 배 아파해선 안 됩니다.  우리는 일본의 영적 구원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일본경제와 한국경제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정치 안정이 우리나라의 정치 안정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은 우리 혼자만 잘 살 수 없습니다.  더불어 사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일본을 축복해야 우리도 복을 받습니다.  일본 교회가 부흥해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이루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당겨집니다.  

   하나님은 우리 민족과 한국 교회가 진정한 용서와 사랑을 배우도록 일본과 일본 교회를 우리 옆에 두셨습니다.  우리는 제주도를 넘어서 일본으로 가야 합니다.  일본과 중국과 세계 모든 민족을 사랑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인류의 행복과 구원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성내는 것은 이렇게 좁은 마음에서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의 좁은 마음, 성내는 마음을 고치기 위하여 그날 밤에 박 넝쿨을 준비하셨습니다.  요나가 그 넝쿨 속에서 ‘아, 시원타!’라고 기뻐하는 순간 벌레를 보내어 그 넝쿨을 먹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동풍을 보내 뙤약볕을 그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곤하여 죽게 되었습니다.  요나가 또 성을 냅니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났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네가 이 박 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요나가 정신없이 대답합니다.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어제는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 때문에 성내던 요나가 오늘은 박 넝쿨 때문에 성을 냅니다.  성 잘 내는 사람은 만나는 일마다 성이 납니다.  그의 눈에는 온통 성낼 것만 보입니다.  

   또 하나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성내는 것과 죽는 것과의 밀접한 관계입니다.  요나는 성이 나서 죽겠다고 말하고 우리들은 화가 나서 죽겠다, 신경질 나서 못 살겠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확실히 화나고 신경질 나면 못 살겠습디다.  성을 내 보십시오.  가슴이 갑갑하고 잠도 못자고 꼭 죽을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누가 옆에서 성을 낼 때도 똑같이 괴롭습니다.  실제로 성이 나서 화병으로 죽는 사람도 부지기수입니다.  성이 나서 죽겠다고 외치는 요나에게 하나님도 죽음을 가지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 요나의 화두가 이제 죽음이 됩니다. “요나야, 너는 박 넝쿨 하나 때문에 죽겠다고 하는데 나는 니느웨에 좌우를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 12만여 명의 죽음 때문에 너를 보냈는데 그렇게 유감이냐? 너의 죽음과 12만여 명의 죽음을 비교해 봐라”  요나가 정신이 번쩍 듭니다.  분노는 가치관에 혼돈을 가져옵니다.  12만여 명의 생명과 많은 육축의 생명을 담부하고 있는 사람이 박 넝쿨 때문에 죽겠다고 깽판 치고 있다니, 요나가 자신을 돌아보게 되자 비로소 잠잠해집니다.  머쓱해졌고 좁은 가슴을 열고 회개하였습니다.

   요나가 성낸 둘째 이유는 이기주의와 욕심에서 나왔습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그가 성낸 이유가 옳을 수 있습니다.  자기 논리로 견강부회하면 이 세상에 이유 없는 핑계가 없고 이유 없는 무덤이 없습니다.  ‘날씨는 더운데 왜 박 넝쿨이 있다가 없어졌느냐?’ 나는 아무래도 화가 나서 견딜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내는 사람 열 명 붙들고 다 물어보십시오.  다 충분한 자기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자기 뜻에 맞지 않을 때 성을 냅니다.  그리고 이 자기 주장에 대한 불평불만은 결국 하나님께 대한 원망으로 옮겨갑니다.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불신앙으로 귀착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내는 것은 하나님께 화살을 겨누는 죄가 됩니다.  그뿐 아니라 분노 안에는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이 가득합니다.  특히 교만과 착각, 시기와 질투, 살인과 증오, 고집과 무자비 등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내는 것은 자신을 더럽게 하고 남을 괴롭히기 때문에 죄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많이 성내는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남으로 하여금 성내게 하는 것도 회개해야 합니다.  분노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우리 모두는 성내는 습관을 뼈저리게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이 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어떻게 이 분노라는 무법자를 이길 수 있습니까?  첫째, 분노는 하나님의 것이지 나의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은 우리가 낼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에 대하여 어디까지나 축복의 사자일 따름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오(시 7:11),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롬 12:19, 히 10:30)고 말씀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죄인에 대하여 영원히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분노를 극복하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심판을 받지 않고 진노 대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속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용이 여자에게 분노한 것처럼(계 12:17) 가시덤불 같이 불타고 말 불쌍한 인생들에게 내가 원수 갚겠다고 덤빌 까닭이 어디 있습니까?  벧전 2:19-24에 말씀합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이 세상 사람들을 재난과 환난으로 징계하사 지옥에서 그들을 이끌어내시기를 원하십니다.  그 슬픈 자들에게 우리까지 나서서 질타할 필요가 없습니다.  거저 축복의 사자로써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 빚진 것을 그들에게 갚기만 합시다.  진노함에서 건짐을 받은 은혜를 생각하고 그들의 무지와 죄악에 대하여 끝까지 참읍시다.  히 12:3에 말씀합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둘째, 비분강개하면서 자기기만에 빠지지 맙시다.  교회는 지상에서 불의와 싸우는 전투 의지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이 존귀케 되어야 하는 곳에 자기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이 드러나야 하는 곳에 자기 명예와 영광을 드러내고, 복음 전파와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곳에서 자기 욕망 챙기기에 분주한 불의들과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이 분노는 사적인 것으로 나타나선 안 됩니다.  전투하는 교회(ecclesia militans)의 분노는 하나님의 말씀이 만홀히 여김 받고 그분의 영광이 가리어지고 기독교 공동체 안에 이단이 들어오고 세상에 악이 창궐할 때에 가지는 의로운 분노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교회는 사랑으로 연약한 이웃을 품어주고 이해하고 치유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자신을 돌아보며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 구원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저는 비분강개하는 신앙인의 의분을 믿지 않습니다.  도리어 두려워하며 불쌍히 여기는 예수 사랑을 믿습니다.  우리는 의로운 분노와 성령의 사랑으로 사적인 분노를 다스려야 합니다.

   셋째,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맙시다(엡 4:26).  사람이 어찌 분을 내지 않고 살 수 있습니까?  바울 사도는 사람이 분노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면서 아주 실제적인 권면을 줍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6-27).  정당한 분노도 절제 없이 지속되면 죄를 짓게 됩니다.  밤 잠자리에까지 계속되면 반드시 마귀가 틈을 탑니다.  그러므로 지혜는 분을 내되 시간을 정해놓고 내고,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없는 것처럼 간주하라고 말씀합니다.  독일에 사는 어떤 부부는 분노에 대해서 특별협정을 맺었다고 합니다.  저녁 9시가 되면 성을 내다가도 무조건 휴전에 들어가고 어떤 말도 추가하지 못하게 했더니 마침내 성내는 것을 다스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내는 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닙니다.  마귀는 성내는 것이 최고선인 것처럼 우리의 격정을 부추기지만 성내는 것은 사실 필요악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계를 넘어 분수없이 죽도록 성내는 것은 사탄에게 속는 것입니다.  성내는 시간에 대해 신사협정을 맺으십시오.  분노를 정복하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말하기도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합시다.  성이 나면 말을 더디 하십시오(잠 29:20).  천천히 말하다 보면 격정이 가라앉습니다.  잠 15:1에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한다”고 했습니다.  성내기도 더디 하십시오.  잠 16:32에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성을 더디 내는 사람은 장군입니다.  성을 내되 더디 내는 사람은 사성장군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신앙인격의 장군이 되고 감성 지배의 사성장군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내는 것을 참으십시오.  성낼 일은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성내게 하는 사람을 용서하십시오.  성을 내되 더디 내십시오.  잠언 기자가 말씀합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잠 19:11).  금년 여름에는 우리 모두가 성내기에서 해방되어 명랑하고 부요하고 강건한 신앙생활을 합시다.  우리의 말뿐 아니라 우리의 삶과 얼굴의 표정으로서도 복음을 증언하는 성도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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