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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9일 / 믿음의 최후 승리
민수기 14:1-10

   새벽이 가장 어두운 것처럼 빛이 가까울 때 어둠이 가장 심합니다.  심한 어둠이 지나가면 곧장 밝은 아침의 태양이 떠오르는 것처럼 역경도 최후 고비가 지나면 위로와 기쁨이 성큼 다가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생활이 견디기 어려운 고비 길을 접어들 때, 현실의 삶이 팍팍하고 악화일로로 나아갈 때 잠깐만 더 참으십시오.  하나님이 곧 오십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바로 눈앞에 임하여 있는 줄 아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에는 언제나 결정적인 순간이 있습니다.  이 결정적인 고비 길을 믿음으로 잘 감당하면 축복이 임합니다.  그러나 그 분기점을 넘어서지 못하면 축복은 연기되고 도리어 권징이 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나폴레옹 황제가 말한 것처럼 ‘최후의 5분간’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함을 받아 하나님의 기적 가운데 드디어 바란 광야 가데스바네아에 이르렀는데 이곳이야말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최후의 고비 길이었고 결정적인 기회였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큰 축복을 주시기 전에 큰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시련이 크면 축복도 큽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행 14:22).  백성들의 지도자 모세는 각 지파 별로 정탐꾼을 뽑아서 40일간 가나안을 정탐하도록 했습니다.  돌아온 정탐꾼의 공적인 보고회가 가데스바네아에서 온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열렸습니다.  먼저 열 지파 정탐꾼이 보고합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비옥합디다. 그러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우리보다 강하고 그땅은 거민들을 삼키는 땅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그들의 보고를 비웃을 수 없는 것은 그것은 그들이 당한 엄숙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상황은 극히 절망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다고 약속하셨지만 약속은 약속이고 실제로 그 땅을 얻기에는 너무나 큰 어려움이 예상됩니다.  전쟁하면 틀림없이 패할 것인데 어떻게 무모한 위험을 무릅쓸 수 있느냐? 는 것입니다.  열 사람 정탐꾼들의 보고를 들은 온 백성들의 간담이 녹아내립니다. “하나님과 모세가 우리를 사지로 인도했구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사랑하는 여러분, 이 백성들의 현실감각은 정확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약삭빠르고 계산 밝은 사람들이 자기가 살고 죽는 일에 멍청했겠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현실 파악 능력에 있지 않고 그들의 중심에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약점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대,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갈망,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열망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기껏해야 감상적이지 실제적이 아니었습니다.  어디까지나 자기중심적이지 하나님과 세상을 섬기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말씀했지요.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 19:5-6, 벧전 2:9).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의 압정에서 해방시키신 것은 첫째, 그들로 하나님을 섬기는 친 백성을 삼고 둘째, 그들로 천하 만민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는 하나님의 종으로 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믿는 자의 대의, 인생의 대의는 생각지 않고 하나님을 자신들의 이용가치로만 생각했습니다.  장엄하고 숭고한 여호와 신앙을 세상적이고 정욕적인 종교로 바꾸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기적이 되고 자기중심적이 되자 하나님이 지금까지 그들을 위해 베푸신  기적의 역사를 깡그리 잊어버립니다.  여러분, 기억이 사라지고 생각이 나지 않는 것 있지요?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지만 더 좋은 음식을 탐냈습니다.  반석에서 물을 마셨지만 더 시원한 음료를 요구했습니다.  전갈과 뱀이 우글거리는 광야에서 하나님 자신이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보호 장벽이 되어주셨지만 그들은 하나님 없는 자유와 평안만을 추구했습니다.  정욕과 욕심에 눈멀고 영적 감각을 상실한 그들은 자상하신 은혜의 손길을 잊어버리고 하나님과 지도자들을 원망했습니다.  온 백성들은 목전에 당한 위험과 불편 때문에 밤이 맞도록 목놓아 울었습니다.  고생한 것이 억울하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원망스럽고 모세가 괘심하다고 불평했습니다. “우리가 옛날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우리와 우리 자녀가 죽는 것을 보는구나, 그만 죽어서 끝장내고 말자”  그들의 눈앞에는 온통 죽는 것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대다수는 그들 자신의 눈으로, 그들이 당한 현실을 분석하고 계산했기 때문에 현실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안한 우리나라 경제는 물론이요, 해마다 총회만 다가오면 학교가 어렵다, 병원이 어렵다는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저는 그들의 소리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소리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볼 때, 학자적 관점에서 볼 때, 전문가적 입장에서 볼 때, 이 세상은 희망이 없다고 장광설을 늘어놓지만 그 이론이 항상 옳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상향식 사고방식, 또는 인본적 사고방식이라고 부릅니다.  상향식 사고방식에는 +α가 없습니다.  십자가도 없고 하나님도 없습니다.  있는 것은 사람의 논리와 역사적 지식과 경험뿐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도,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기대도 없기 때문에 절망과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현실을 개조하는 새 역사의 창조가 자리할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60만 중에 두 사람, 30만 분의 일의 확률로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여호수아와 갈렙입니다.  성경은 하도 이 사람들이 귀한 보배 같기에 여러 번 그 가문까지 소개합니다. “그 땅을 탐지하러 갔던 사람들 중에 오직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생존하니라”(민 14:38).  그 두 사람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백성들이여 울지 마세요. 두려워하지 마세요. 여호와께서 기뻐하신다면 우리는 이 난국을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맙시다.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들의 보호자는 이미 떠났고 그들은 우리의 밥에 불과합니다”  똑같은 현실을 여호수아와 갈렙은 다른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현실을, 홀로 종말론적으로 주장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눈길로 보았습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신앙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신앙적 사고방식을 하향적 사고방식이라고 부릅니다.  

   현실보다 크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눈으로 보니 문제는 하나님의 뜻과 허락과 약속에 있지 현실 상황에 있지 않았습니다.  내가 보기에 어떠한가? 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 가 문제의 핵심입니다.  다시금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하여 보니 분명히 이 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땅이었습니다.  약속의 차원, 말씀의 차원에서 보니 가나안 거민이 비록 강대하지만 그들의 보호자는 이미 그들을 떠난 것이 보였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며, 한걸음 나아가 그들은 우리가 먹을 쌀도 아니고 벌써 밥이 되어서 우리가 점령할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라(잠 16:9) 그들은 이미 쫓겨났고, 죽이기로 작정된 물건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갈렙과 여호수아는 별 사람이 아닙니다.  현실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감각은 다른 탐정꾼들과 같았습니다.  다만 그들은 아래에서 현실을 올려다 본 것이 아니라, 위에서 현실을 내려다보았습니다.  문제는 똑같아도 그 문제를 보는 시각에 따라서, 보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서 문제는 각기 달라 보입니다.  부산 서구시민이 보는 도시계획과 국토부에서 보는 도시계획이 다릅니다.  버스 안에서 보는 시가지와 비행기 안에서 보는 시가지가 다릅니다.  거리에서 보는 사람의 모습과 공중에서 보는 사람의 모습이 다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에서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을 업신여겼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사랑의 열정이 사라지자 인간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무용성을 주장하고 약속의 말씀을 등 뒤로 던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죽이려 한다고 하나님을 원망했고, 그들을 망하게 한다고 모세를 죽이고자 했으며, 제각기 살길 찾기에 바빴습니다.  반면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 중심에 섰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사랑과 열정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이 믿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하는 눈으로 보니까 가나안은 이미 그들의 손 안에 떨어져 있었고, 뜨거운 확신은 불꽃처럼 타올랐습니다.  그들에게는 어디서 산다, 어디서 죽는다가 별다른 의미가 없었습니다.  내가 부산에서 썩고 암남동에서 썩는다는 생각이 들지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자는 사나 죽으나,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을 위하기 때문에 만족하고 만족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나라를 믿었고,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섰고, 하나님의 말씀을 단단히 붙잡았습니다.

   눅 17:20-21에 이런 대화가 나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묻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among you 즉 너희 가운데 있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예수 계신 곳에 있고, 믿는 자의 가슴 속에 있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아가는 현실 가운데 있습니다.  이미, already 임하여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두고 신앙과 불신앙이 늘 충돌합니다.  가데스바네아, 하나님이 주신 절호의 기회와 장소에서 그들은 격렬하게 부딪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말씀에 대한 열정에 사무쳐 외쳤고, 열 정탐꾼과 백성들은 인간적 공포와 혈기와 분노에 사로잡혀 외쳤습니다.  역시나 다수 앞에 소수는 굴복되기 마련입니다.  온 회중이 돌로써 갈렙과 여호수아 그리고 모세와 아론을 쳐 죽이려고 달려듭니다.  네 사람은 온 회중 앞에 엎드렸고 믿음은 불신앙의 밥이 될 상황으로 급전됐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믿는 자를 버리시겠습니까?  그들의 기도를 물리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자신의 역사하실 때를 놓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가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하나님이 하셨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결정적인 순간에 틀림없이 개입하십니다.  자기 아들의 피를 주고 사신 교회를 눈동자 같이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눈을 누가 촉범할 수 있습니까?  본문 10절을 보십시오.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 하는데 그 때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 할렐루야!  하나님이 영광이 나타나 온 백성을 압도하였습니다.  현실은 하나님의 무대요 하나님의 심판대입니다.  하나님의 시험이 끝나자 하나님의 음성이 판결을 선언합니다.  먼저 불신의 백성들을 향하여 말씀합니다.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11절) 진실로 내가 살아 있는 것과 여호와의 영광이 온 세계에 충만할 것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이라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22-23절)”

   그 다음 신앙의 사람들에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내 종 갈렙과 여호수아는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24절)”  사랑하는 여러분, 누가 약속의 땅을 차지하였습니까?  현실을 인간적 차원에서만 분석하고 계산하며 두려워한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현실을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신앙적 차원에서 해석한 사람들입니까?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끝까지 말씀을 의지했던 사람들이 차지했습니다.  여러분, 찬찬히 생각해 보십시오.  저희가 잡히겠다고 말하던 유아들은 모두 구원받았지만 약속의 땅을 악평하던 자들은 그들이 정탐한 날수대로 40년간 광야에서 유리하다가 죽어 백골로 변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우리 앞에 어떤 문제, 어떤 어려운 상황이 가로놓여있어도 이 땅은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의 지배를 받습니다.  역사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진행됩니다.  상향식 사고방식을 버리고 하향식 사고방식을 취하십시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하나님은 약속을 믿는 자에게 현실을 딛고 승리하는 능력을 주십니다  Paul Tillich는 그 믿음을 ‘존재에의 용기’라고 불렀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하여 물 위로 걸어갈 때 실상 그는 ‘물 위로 오라’(마 14:29)는 예수님의 말씀 위를 걸어갔습니다.  그런 그와 예수님 사이에 풍랑이 끼어들자 그만 물이란 현실의 벽에 가로막혔고, 말씀 대신 물을 보게 되자 물 속으로 빠져듭니다.  M. Luther는 심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존재에의 용기’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합니다. “나는 이 말씀 위에 섭니다. 주여, 나를 도우소서”  우리가 믿을 것은 다만 예수와 그분의 약속뿐입니다.  현실을 보고 낙심하거나 떨어선 안 됩니다.  현실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하향적 사고방식, 또는 ‘존재에의 용기’를 가지고 다스리고 정복할 대상에 불과합니다.  현실 상황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요 하나님이 설치하신 무대에 지나지 않습니다.  바람이 불면 바람을 타고, 풍랑이 일면 그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가면 됩니다.  찬 373장, ‘고요한 바다로’ 2절을 두 번 부릅시다. “이 풍랑으로 인하여 더 빨리 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은 출애굽 했으나 가나안에는 들어가지 못할 수 있습니다.  천국 시민은 되었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고 내 삶을 접을 수 있습니다.  구원은 받되 부끄러운 구원받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계 22:11)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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