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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3일 /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 ③
로마서 12:9-21

   “사랑의 수준을 높입시다. 영적 품격이 있는 교회, 영적 기품이 있는 성도가 됩시다” 이것이 우리 교회 2018년 하반기의 캣치 프레이스입니다.  우리 교회 사랑의 수준이 세상의 그것보다 높지 못하면 우리는 세속에 짓밟힐 것입니다.  우리 교회 사랑의 품격이 세상보다 높아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의 현실적 우월성에 관해서 강력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높지 못하면,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오늘 우리에게는 사랑의 실천에 대해 보다 세심한 주의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과 실제로 사랑하는 행위와는 대부분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정작 사랑하기 위해서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결의가 필요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사랑의 연습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의 대상에게 진실한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열심으로 상대의 필요를 채우며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소망 중에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일정한 시간을 들여서 기도해 주는 것입니다.  먼저 대접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사랑의 실천, 그 다음 부분의 더 어렵고 미묘한 사랑의 고차방정식을 풀어봅시다.

   첫째, 사랑한다는 것은 원수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원수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인 원수가 아닙니다.  죽음과 마귀는 생래적인 원수입니다.  죄도 원수입니다.  그런 원수는 언제나 원수 그대로 존재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원수는 정치적인 원수, 영적인 원수라기 보다는 어제는 친구였지만 오늘은 날 미워하는 사람들입니다.  어제는 동료였지만 오늘은 날 핍박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또는 내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늘 곁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에 대해서 늘 적의를 가져도 될까요?  사탄이라고 규정하면서 저주하며 살아도 되는 것일까요?  세상 사람들은 그래도 될는지 몰라도 우리 믿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누구에게 물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안에서 배워서 아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싸워보세요.  친구와 다퉈보세요.  마음이 괴롭습니다.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예배시간에 교회당에 앉아있어도 마음에 은혜가 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셨지요.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1-26).  

   사도들도 언급합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본문 14절)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딤전 2: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8-9)”  원수를 미워하는 것은 타락한 인간 성품에는 자연스럽지만 예수님은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3-44)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눅 6:27)”  원수의 안녕과 건강을 빌고 장수와 행복을 도모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부자연스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다 하실 수 있는(막 10:27)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요 복음의 진정한 능력입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예수님께서 그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혹 세상에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 같이 불의한 자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롬 5:8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는 이 주님의 사랑으로 거듭나고 의롭게 되고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우리에게 잘하는 사람만 사랑하고 잘못하는 사람은 미워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내 사랑의 수준으로 평준화하는 신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구하려고 외아들을 이 땅 위에 보낸 거룩한 사랑이 기껏해야 나를 좋아하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자유를 만족시켜 주기 위한 것일까요?  우리는 원수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그 원수는 대개 내게만 원수이지만 내가 원수까지 사랑할 때야 비로소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보여주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수를 위해 기도하게 될 때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고귀한 사랑인지 알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은 쉬운 사랑이 아닙니다.  값싼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지극히 큰 거룩한 사랑입니다.

   우리가 원수를 축복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그래야 그 원수로 인하여 나의 사랑, 나의 행복이 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 안에는 미움도 없고 불의도 없고 시기도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원수를 미워하고 저주하면 먼저 그 미움과 저주가 나를 통과해야 합니다.  마치 남의 얼굴에 흙을 묻히려면 먼저 내 손에 흙을 묻혀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원수를 미워하고 저주할 때 그 미움과 저주가 먼저 나의 사랑을 교란시킵니다.  나의 평안을 깨뜨립니다.  우리에게는 원수를 판단하실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에게 보복과 심판의 일을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나는 그저 사랑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가슴 아프고 손해 보더라도 끝까지 사랑의 행로로만 나아가야 합니다.  원수의 장래는 하나님의 영광에 속한 것입니다.  원수의 처분은 하나님의 몫이요 권리입니다.  나는 다만 원수의 존재 때문에 나의 사랑, 나의 평안이 방해를 받지 않도록 지혜롭게 살아야 합니다. “오 주님, 나는 다만 복된 존재이길 원합니다. 사랑의 통로로만 살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이렇게 원수의 존재를 내 마음에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청일전쟁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났을 때 손해는 누가 보았습니까?  된통 우리나라만 폐허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원수를 고요히 돌려보내려면 원수에게 사랑의 선물을 안겨주어야 합니다. “원수님 안녕히 가십시오 내 속에 어떤 형태로든 머물지 마십시오”  내 마음에 다가오는 원수가 크면 클수록 더 많이 복을 빌어야 내 자신을 지킬 수 있고 원수를 떠나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결과적으로 더 높은 수준의 사랑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형제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내적 의미는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자리에 이르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려면 나 자신과 다른 형제를 구별하지 말고 그와 같은 위치에 서야 합니다.  바울 사도가 말씀합니다.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라”(고전 9:20-22).  보세요.  우리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에 범사에 우리와 같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부유하셨지만 가난하게 사심으로써 가난한 우리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분은 의로우셨지만 죄인의 모양으로 오셔서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분은 죽을 수 없는 분이셨지만 말씀이 육신이 되사 악인들과 함께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마지막에는 부자도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의미로 부자의 무덤에 장사지낸바 되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만 언제나 우리와 한결 같이 함께 계십니다.  우리의 천한 가슴에 들어오십니다.  우리의 더러워진 삶 속에도 오십니다.  오셔서 용서하시고 이해로 감싸주십니다.  함께 우시고 함께 즐거워하십니다.  사랑은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웃는 자와 함께 웃습니다.  사랑은 마음을 같이하여 조금도 잘난 체 하지 않습니다.  홀로 신사연하지 않습니다.  지위가 높거나 낮거나 일시동인합니다.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기꺼이 교제합니다.  사랑 때문에 왕위를 버린 사람을 보세요.  그는 사랑 때문에 평민과 함께 살기로 선택합니다.  사랑 때문에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내 곁에 오신 주님을 보세요.  그분은 나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분은 나 대신 고난 받으시고 나 대신 죽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나의 친구이십니다.  그분은 대회 중에서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십니다(히 2:11).  사랑은 사랑하는 자와 하나가 되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자와 동등한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너와 나의 거리가 얼마인가를 재어보지 않습니다.  허물을 찾거나 못난 것을 보지도 않습니다.  나이, 지식, 재산, 지위의 차이를 따지지 않습니다.  도리어 서로 얼마나 가깝고 비슷한가를 찾습니다.  “잘난 체, 아는 체, 높은 체, 있는 체”하는 사람들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괴로웠습니까?  사랑은 모든 체를 벗어버립니다. 할렐루야!  사랑은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않습니다(16절).

   셋째, 사랑한다는 것은 언제까지나 선한 것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고전 13장에는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7절은 더욱 적극적이고 구체적입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면 상대방의 악이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는 여러분의 마음을 얼마나 자주 상하게 합니까?  얼마나 많은 죄를 짓습니까?  그러나 부모는 자식에 대해 좋은 것만 생각합니다.  제 눈에 안경이라고 짱구머리도 황금 이마로 보입니다. “우리 아이는 한 번도 속 썩인 일이 없습니다” 물론 거짓말입니다.  그래도 예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하니까 그렇습니다”  사랑이 그렇게 만듭니다.  사랑이 우리 눈을 멀게 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 악한 것을 기억하지 않게 만든 것입니다.  사람들인 부모도 그렇다면 하물며 우리를 사랑하사 죄와 사탄의 권세에서 구속하기 위해 자기 아들을 버리신 하나님이시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되 한없이 용서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고(미 7:19) 주의 등 뒤에 던지십니다(사 38:17).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시고(시 103:12) 우리 허물을 도말하사 기억하지 아니하십니다(사 43:25).  그리고 오직 우리의 좋은 것만 생각하십니다.  아무리 작은 착한 일도 기억하십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사랑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만 보지 않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사랑스럽게 만들어서 봅니다. 할렐루야!  이것이야말로 사랑의 위대한 힘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선한 것만 기억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선에서 더 큰 선이 나옵니다.  아름다움에서 더욱 아름다운 것이 나옵니다.  사랑의 향기가 만발하고 행복의 꽃이 핍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악을 고친다고 악을 말하다가 악에게 사로잡힙니까?  악의 제국은 악한 수단을 잘못 사용하다가 늘 망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목적도 선하고 동기도 선하고 결과도 선해야 합니다.  좋은 목적이라도 방법이 잘못되면 그 방법 때문에 목적도 흐려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선을 말하므로 악을 극복하십시오.  선을 칭찬함으로 악을 잠재우십시오.  사랑은 도무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선한 것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씀합니다.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그는 항상 존귀한 일에 서리라”(사 32:8).  악을 제거한다고 악을 사용하지 마세요.  그것은 악에게 속고 마귀에게 속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한 것 가운데서도 귀한 것을 끌어내십니다.  악한 것 가운데서도 선한 것을 찾아내십니다.  죄인을 불러 회개시켜 의인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한다는 것은 원수, 곧 나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거슬려 모든 악한 말을 하여 못 살게 구는 원수까지도 마음으로 축복하는 것입니다.  원수가 심하게 공격해 옵니까?  더 많이 축복하세요.  축복기도의 바리케이드로 나의 사랑을 지키고 보호하세요.  그래야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형제와 모든 일에 기꺼이 함께하는 것입니다.  친구가 되고, 형제가 되고, 조금이라도 구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시하거나 교만하거나 체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언제까지나 선에 속하고 선만 추구하는 것입니다.  다음 격언을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의 선을 말하라 그리하면 그의 선이 대답하리라 그의 악을 말하라 그리하면 그의 악이 대답하리라”

prayer
   오 주여, 내 자신의 사랑이 황폐화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욱 맹렬히 기도하게 하소서.  형제를 밑도 끝도 없이 구별한 나의 죄를 용서하소서.  별로 잘나지도 못하면서 잘난 체한 지지리도 못난 종의 죄를 용서하소서.  모든 사람을 동일시하여 기꺼이 하나가 되게 하소서.  언제까지나 선만 기억하고 선만 말하고 선만 행하게 하소서.  그리고 바로 이것이 사랑이며 선으로 악을 이기고 은혜로 사람을 이기는 길임을 알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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